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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목표는 없다: 에르네스토 코피뇨 박사의 삶

시성을 위한 과정에 있는 1899년 6월 5일 출생한 에르네스토 코피뇨 박사의 Scepter 출판사에서 출간 된 새로운 자서전을 읽는 것이 지금부터 가능합니다.

뉴스2020-6-6.

“나의 삶에서 몇 가지 기억들을 끄집어내자면, 저는 감당할 수 없이 오래 지속되며 중요한 엄청난 두 시기로 그 기억을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 기억은 1899년부터 1953년 사이의 기억인데, 확실하지 않은 목표로 기나 긴 준비의 여정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의 기억을 되돌려보면 평탄치 않은 확실한 방도의 더 좋은 길이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이 말은 Scepter 출판사에서 최근에 발행된 에르네스토 코피뇨 박사의 새로운 자서전에서 나오는 도입부의 말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부인 클레멘시아를 돕고 4명의 자녀를 양육하면서도 피곤한 기색 없이 병자들을 도와주고 영양실조에 걸린 마야 어린이들 위해 일을 한 과테말라의 유명한 소아과 의사의 인생을 작가인 토마스 A. 맥도넛은 자서전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1954년 그는 이제 막 그의 고향인 과테말라에서 오푸스데이의 사도직 업무를 시작한 사제를 만났습니다. 종종 가톨릭 믿음에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분위기에 적대적이었던 그는 그 사제를 만난 이후 이듬해에 그의 인생에서 감각적으로 필요했던 영적인 차원이 더 완전히 개발되었습니다.

아래는 그의 영적인 삶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을 때 기술한 글 중에서 짧게 발췌한 것입니다:

과테말라 시민 전쟁이 발발하기 전, 에르네스토는 1954년 6월 8일 북 캘리포니아에 있는 듀람의 듀크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병원에 입원하게 된 그의 아들인 호세 에르네스토를 보러 미국으로 긴급한 여정길에 올랐습니다.

“저는 골치가 아픈 순간에 과테말라를 떠났습니다. 비통 속에서 저는 제 아내와 아이들을 뒤로하고 떠났습니다.”

“듀크에서 저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쳐했습니다. 과로? 향수병? 알게 뭡니까. 분명한 것은 제 아들이 혼란에 빠졌고 그 아이가 받은 진단은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혼자였습니다. 그곳에는 그 누구도 저를 위로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문에 보도되는 저의 나라 과테말라의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는 뉴스를 보면 더욱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비통은 제 마음에 못을 박은 것처럼 차갑고 무자비했습니다.”

에르네스토는 그의 걱정들을 미사 중에 예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1954년 당시에 듀람에는 가톨릭 성당이 오직 2개 밖에 없었습니다. 성 십자가 성당은 그나마 더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내면은 부유한 것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저는 그날 미사에 참례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눈물이 제 눈에서 솟구치게 나왔고 얼굴을 적셨으며 제 시야를 가렸습니다. 그 눈물을 통해서 저는 제대 위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실물 크기의 그림을 보며 묵상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저를 위해 못 박히셨고 가슴에 창이 찔린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저를 감싸 안아주고 싶어 하신 것 같아 보였습니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눈물은 더 정화시켜줬고 제 가슴에 박힌 못은 점점 녹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실 시간이 다가왔을 때, 저는 이미 침착한 상태였습니다. 다시 용기가 났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 . 그리고 정말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제 아들은 회복했고 저는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가 오푸스데이를 알아보았고 주님께서 저를 부르고 계셨음을 명확하게 이해했습니다. 왜냐고요? 제가 했던 그 어떠한 것도 그 어떤 대상을 위해 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푸스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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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토 코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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